어제 저녁에 테이트 모던 갔다가 밀레니엄 브릿지를 건너는데 야경이 몹시도 예쁜 거다.
그간 야경엔 늘 심드렁 했는데 어제는 새삼스레 정말 정말 예뻤다.
그 순간 콜드 플레이의 더 사이언티스트를 듣고 싶었고 핸드폰 배터리가 위태로웠지만 그걸 틀었다.
이런 도시에 머물 날이 얼마 안 남았다니 슬프기도 하고 그냥 이 순간이 아름답기도 하고 이런 저런 감정이 뒤섞였다.
그래서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타워 브릿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또 '남기려는 마음' 따위의 것들을 떠올렸겠지만 그 때는 아니었다.
그냥 죄다 예뻐보여서 찡했다.
그렇게 다리 반대편까지 다다라서는, 작업복을 입고 한 쪽에 엎드린 채 뭔가 하고 있는 아저씨를 발견했다.
가까이서 보니 눌러붙은 껌딱지에 그림을 그리고 계신 거였다.
세상에.
주변 바닥을 자세히 보니 껌딱지마다 귀여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 정말.
아저씨 가까이에 가서 그리는 걸 보고 있으니 먼저 인사를 건네셨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굉장해요. 이 그림들 정말 맘에 들어요!"
"고마워요. 어디서 왔어요?"
"한국이요."
"오, 그렇군요."
"언제부터 이걸 시작하셨어요?"
"꽤 됐어요. 500개 정도의 그림을 그렸는데, 다들 잘 모르죠."
"와… 그치만 정말 사랑스러운걸요."
"하하. 난 작은 것들을 좋아해요."
"저도요!"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요?"
"네, 그치만 그냥 취미일 뿐이에요."
"주로 뭘 그리나요?"
"음…곰이요."
"오, 곰 좋죠."
"이게 제 곰들이에요."
"와, 좋네요."
"고마워요."
"하하, 보여줘서 고마워요."
그 때 빗방울이 떨어졌고, 나는 비가 오는데 괜찮으신 거냐고 여쭈었다.
아저씨는 물론이라 답했고, 나는 다음주에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그 전에 이 그림들을 다시 보러 오겠다고 했다.
아저씨는 또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튜브를 타러 가는 길, 비는 후두둑 내렸지만 기분이 좋았다.
내 손엔 테이트 모던 서점에서 산 '빈센트' 한 권과 스무 장 짜리 A6 종이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기분좋게 웃으며 '500여개의 그림을 그렸는데 다들 잘 몰라요' 라던 아저씨의 말이, 밀레니엄 브릿지의 야경과 함께 마음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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