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했다. 여러 출판사의 시인선이 잔뜩 꽂힌 서가를 훑으면서. 자꾸만 따분했다. 그래도 나는 문학동네 디자인을 좋아라 하니까, 그 쪽을 한 번 더 봤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한 권 꺼내보았다. 날개에 적힌 시인의 말이, 시집의 제목, 표지의 색깔과 겹쳐지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따분하지 않았다. 멸균된 연핑크빛 단어들. 구차하고 우스운, 지저분한 것들. 그런 게 여기 다 있었다.
한 줄 김밥이랑, 훈제 통닭, 담배랑 막걸리랑
잡히는 대로 봉투에 담아
문밖, 아까부터 나를 훑어보던 아저씨한테 갖다줬지
단골 개거지 아저씨
그리고 내 소원을 말했다
가서
그냥 죽어요
오늘 포텐션 최고.
- 월급날
잠도 없이 꿈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네요 내
운명이 침묵하라면 그래야겠죠? 살짝 데운 우유에 생긴 뜨
거운 막 같은 것, 방금 그런 게 먹고 싶어졌어요
- 로맨티시즘
일어서서 그대로 나와버렸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어, 니
가 나를 부르고 있었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길을 내려갔다
너는 계속 내 이름을 부르며 따라왔지 나는 살짝 더 빨리 달
리며 울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니가 외치면 외칠수록 낭만적인 이 기분.
- 기대
버린 걸 주워다가 난 어디를 닦은 걸까? 다음 학기에는 나
가랄까봐 집에 가면 설거지를 했어, 내 것도 아닌데 사촌 방
도 닦아주었다 그러고 쓰러지듯 잠들었지 친척집이란 그런
것, 오늘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걸레를 밀 힘이 없으니까
"가져, 너 다 가져!ㅋ"
은혜를 베풀면서 네가 말했다.
- 편입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