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 아랑곳않고 산책을 하니 밤이었다.
어디로도 향하지 않았는데 자꾸 어디론가 당도했다.*
"여기 와 본 적이 있어요."
희뿌연 공기를 헤치며 내가 말했다.
"그 때랑은 완전히 바뀌었네요."
"그래요? 저는 처음 와 봐요."
너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나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여기에 대해 아는 것은 모두 사라졌으니, 더는 여기에 와 보았다고 말해서는 안 되었다.
작고 차가운 것이 허락도 없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것들이 머리칼과 옷을 적셔오는데 누구의 탓도 할 수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우산을 사는 게 좋겠죠?"
"아무래도 그칠 것 같지가 않아요."
우리는 서로를 붙들지 않고, 각자의 우산을 붙들었다.
*황인찬 시인의 「이것이 시라고 생각된다면」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