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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고라운드

Thoughts

by TokyoShin 2018. 11. 26.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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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고 라운드


11월 24일 토요일. 보스토크 <메리고라운드> 토크에 갔다. 두 사진가가 하나의 세션으로 엮여 각자 25분 씩 작업을 소개하는 행사였다. 나는 세 개의 세션에 참여했고 네 사진가의 작업 이야기, 두 연구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 세션은 김신식 연구가의 진행으로 이뤄진, 윤원화 연구가의 신간과 엮인 대담이었다. 각 작가를 면밀히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들이 한 세션으로 엮인 기준을 헤아리는 즐거움이 있었다. 지난 겨울 동일 장소에서 열린 보스토크의 강의 시리즈 이후, 벽면을 가득 채우는 고해상도 이미지를 다시금 마주하는 것도 좋았다.



김경태(EH)

몇 년 전 무수한 돌의 표면을 담은, 작가의 사진집 <온 더 록스 On The Rocks>를 넘겨 보고도 구매하지 않은 순간이 아직도 떠오른다. 작가에 대해 아는 바가 전무하던 때였다. 나는 훗날 그의 이름을 여기저기에서 보았고, 이따금 그 순간을 돌이켜 후회했다. 


사진을 감상하기 좋은 환경에 놓인 김에, 작가는 지난 작업을 차례로 보여주는 시간을 가졌다. 그의 사진들은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에 포획하는 사진 매체의 한계 혹은 특성을, 3차원보다 치밀한 2차원의 이미지로 뒤집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가 촬영한 돌, 책, 너트, 테라조는 그 표면의 입자나 질감을 첨예하게 드러내어, 실제 사물을 눈 앞에 두고 보는 것보다 정확하고 세밀한 시각 경험을 하게 한다. 이를 위해 그가 주로 쓰는 방식은, 피사체의 각 부분에 초점이 맞은 이미지 수백 장을 합성, 모든 부분에 초점이 맞아있는 한 장의 이미지를 만드는 '포커스 스태킹'이다. 작업실의 테라조 바닥을 찍은 최근 작업은 돌, 책, 너트와는 조금 다른 재미가 있었다. 피사체 자체가, 이미 (3차원의 돌이) 2차원의 평면으로 구현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미술품을 전시・판매하는 행사에서 해당 이미지의 원본을 확대한 버전을 선보였다고 했다. 이는 흔히 "1 대 몇"으로 축소되는 스케일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라고도 했다.


한편 그가 찍은 건물 사진 역시 생경하고 선명한 평면으로 다가왔다. 캄캄한 밤 홀로 불을 밝힌 모텔의 네온사인과 LED 빛을 촬영한 <모델라인 Model Line>이 특히 그랬다. 그의 건물 사진들을 보면서 수개월 전 작가의 사진집 <앵글스 Angles>를 사지 않은 순간을 후회했다. 그가 촬영한 건물의 모서리를, 종이가 접히는 지점에 맞춰 디자인한 인쇄물이다. 목적이 뚜렷한 매체에 담긴 평면을 바라보는 경험을 놓친 일이 아쉽기만 했다.



박신영(Bahc.)

나는 작가의 사진을 어렴풋이 본 적이 있었고 막연히 패셔너블하다고 생각했다. 단정한 채 아름다운 이미지가 시대의 미를 체화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작가의 태도 혹은 방식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오해이기도 했다. 마이크 앞에 앉은 작가는 두 가지 작업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기록'이라는 사진의 매체적 특성과 느리고 꾸준한 개인의 성격이 반영된 아카이브 작업이었다. 스위스의 어떤 시계 브랜드를 위한 <랩 Lab>과 가상의 라이브러리를 구성한 <매테리얼 라이브러리 Material Library>가 차례로 소개되었다.


그는 시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시계가 만들어지는 실험실의 풍경과 시계 부품을 백과사전처럼 나열한 이미지를 통해 흥미를 자아내고 싶었다고 했다. 아날로그적인 추가 작업을 거친 실험실 이미지는 마치 시뮬레이션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소 객관적인 방식으로 시계를 둘러싼 비밀스러운 서사를 만든 지점이 아름다웠다. 


암석을 중심으로 촬영한 <매테리얼 라이브러리> 역시 같은 지점에서, 좀 더 극적으로 아름다웠다. 물질을 아카이브하는 라이브러리라는 실재하는 공간이다. 작가는 암석이라는 물질을 매개로 가상의 라이브러리를 구상해 나갔다. 여기에는 세 가지 시공간이 담긴다. 석판과 암석 조각 등 물질이 수집된 라이브러리의 풍경, 커다란 암석 혹은 지층의 풍경, 정직하고 정교한 암석 조각의 풍경이다. <랩>과 비교하면 새로운 시공간(커다란 암석 혹은 지층)이 하나 더 삽입된 셈인데, 바로 그 지점이 이 작업을 좀 더 극적으로 아름답게 하는 요인이었다. "물질의 근원이 되는 풍경"과 같은 생각을 하면 너무 재미없을까. 그저 시각적으로, 그리고 서사적으로 아름다웠다고 서둘러 맺는다.  



노순택

작가의 이름은 낯이 익었다. 그럼에도 그가 시대를 분절하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는 사실만을 알았다. 나는 역사를 똑똑히 바라보는 일에 무척이나 취약하여 현장 사진 같은 작업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작가는 <망각기계>라는 작업을 이야기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기억을, 6년 남짓한 시간동안 담아낸 작업이다. 이는 2012년 학고재에서 전시되었고 사진집으로도 출간되었다. 작가는 당시 전시 흐름에 맞추어 사진을 소개했다. 이 작업에서 중요한 글이라고 생각한다는 작가 노트를 화면에 띄워 읽어주기도 했다. 그는 "어쩌면 망각이야말로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기억이 공식적인 역사가 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망각을 유도한다고 했다. 


작가는 망월동 옛묘역에서 자연히 훼손되어가는 영정사진들을 몇 번이고 기록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훼손된 사진이 개인의 삶에 대한 은유 같았다고 했다. 그는 그 흐려진 얼굴들을 화순에 위치한 운주사 불상의 얼굴과 연결지었다. 운주사는 희생자 유가족들이 마음을 달래곤 했다는 장소다. 


또다른 줄기로, 작가는 당시 사건을 기념하고 재연하는 모습, 묘역에서 오열하는 유가족의 모습과 그 장면에 카메라를 들이댄 수많은 미디어의 모습 등 부조리한 광주의 풍경을 담았다. 풍경 뒤로는 보험사, 증권사 등의 광고가 보였다. 그는 지금 광주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보험과 증권)이 역사가 된 사건과 혼재하는 장면으로부터 질문을 던졌다. 당시의 죽음들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나는 계속해서 역사를 똑똑히 바라보는 일에 취약할 것이다. 그것은 늘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처럼 묵직하고, 그렇게 가책없이 사실을 망각한다. 그러나 작가가 "기억이 공식적인 역사가 된다는 것"에 대해 조금의 신파 없이 던진 질문은, 아주 가끔 떠오를 지도 모른다. 아니, 아주 가끔 떠올랐으면 좋겠다. 



홍진훤 

지난 겨울 보스토크 강의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은 이름 중 하나가 홍진훤이었다. 그는 첫 강의에서 "로케이션의 문제"라는 주제와 엮여 소개 되었다. 그가 촬영한 사진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하거나 위치를 알아볼 수 없거나 쫓아도 대답할 수 없는 풍경만이 거기 있었다.


작가는 "집"을 주제로 가져왔다. 집에 딱히 관심이 많은 건 아니었는데, 어려서부터 재개발이 진행되는 외곽 지역으로 이사를 다녔다고 했다. 재개발 지역에는 임시적인 풍경이 많았다. 작가는 사라질 풍경들을 촬영했다. 의도적으로 임시적인 풍경을 모은 <임시풍경>이라는 작업을 하고 나서는 "서울에서 임시적 풍경을 찾아다녔으나 임시적이지 않은 풍경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포기하련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소개한 작업은 이주 마을의 건물들을 촬영한 것이었다. 각종 개발에 떠밀린 사람들은 새로운 곳에서 평생의 꿈을 실현하려는듯 각자의 주택을 지어 이주해왔다. 꿈이 담긴 주택들은 각종 건축 양식, 조악한 자재, 뜬금없는 구조가 뒤섞여 이상한 풍경을 만들었다. 또다른 이주 마을에서도 이같은 풍경은 반복되었다. 묵직한 강압과 둥둥 뜬 파라다이스가 혼합된 결과였다.



메리 고 라운드


마지막 세션에서 윤원화 연구가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시간이 끝난 후 한참이 지나도록 그가 내뱉은 몇 개의 문장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중 하나는 "서울에서는 영원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문장이 한 시간 쯤 전에 들은 홍진훤 작가의 말—서울에는 임시적이지 않은 풍경이 없는 것 같다과 겹쳐졌다. 임시와 필멸의 도시에서, 나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대설주의보와 통신장애가 한꺼번에 닥친, 서울의 재난 속에 남은 거대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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