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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 회고 2010 ~ 2018 - 2

Thoughts

by TokyoShin 2018. 12. 25.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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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 회고 2010 ~ 2018

2010년대 시간의 장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4. 홍상수 월드를 뒤로 하며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을 교양 수업 시간에 보았다. 인생에 손꼽을 만큼 불쾌한 영화였다. 그해 <옥희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았다. 영화의 화자인 옥희가 구질구질한 남자 둘을 넘나드는 내용인데, 그가 두 남자와 각각 겪은 일을 나열한 뒤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놓고 보고 싶었습니다”하고 읊조리는 내레이션이 유달리 기억에 남았다. 그 뒤로 홍상수의 전작들을 도장깨듯 차례로 관람했고, 급기야 좋아하게 되었다. 웃긴 일이다.


호기심 많은 나는 홍상수 영화에 관한 기사를 마음껏 읽어내려갔다. <옥희의 영화> 포스터를 촬영장을 지나던 행인이 찍은 기념 사진으로 만들었다는 자잘한 것부터, 홍상수가 극본을 쓰고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이 즉흥적으로 이뤄진다는 제법 중요한 정보까지 얻었다. 거의 매년 한 편 이상의 신작을 내놓는 감독이니 워낙 파고들 거리가 많았다. 나는 점점 홍상수 월드에 빠져들어갔다.


홍상수를 향한 평론가들의 극찬, ‘칸의 남자’라는 수식은 홍상수 월드를 좋아하는 마음에 확신을 갖게 했다. 내가 앓던 인문학 병은 ‘반복과 변주’라는 그의 영화적 테마와 삶에 대한 관조적 인식을, 아주 대단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당시 적어두고 외울 정도로 좋아한 그의 영화 속 대사가 셋 있는데, 모두 당연한 인식을 프레임화하고 관조하는 것이다.


2015년 페미니즘 운동이 새롭게 떠오르면서, 홍상수가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도마 위에 올랐다. 남성의 외도와 이를 용인하는 여성이 반복되는 서사 속에서, 여성이 소모적으로 다뤄지는 지점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그가 자기 변명을 담은 영화라는 이야기도 퍼졌다. 내 비위는 이 모든 사실을 인지하면서 그의 영화를 볼 정도로 좋지 않았다. 나는 홍상수 월드 속 남성을 찌질하다 웃어넘기고, 그 찌질한 남성으로 가득한 영화에서 내 구질구질한 연애감정을 발견하고 자조하던 시절이 낯부끄러워졌다.


2015년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마지막으로, 나는 그의 세계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변함없을 사실이다.




5. 인디 감수성과의 결별


2014년 6월 10일, 나는 이런 말을 썼다. “웃기지도 않지만 이런 말을 내뱉고 싶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곡을 듣고 싶어.” 어떻게 저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쓸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나는 마이너를 빙자한 특정 집단적 취향에 한 획을 그은 영화 <500일의 썸머>, <이터널 선샤인>을 비롯한 미셸 공드리의 귀엽고 이상한 영화들, <트레인스포팅> 같은, 술 마시고 마약하는 젊은이들의 엉망진창 서사를 너무 좋아했다. 이 집단에서 지금 가장 인기있는 플랫폼인 넷플릭스에서는 <빌어먹을 세상따위>가 해당 류의 서사를 보여준다. 나는 그걸 시청한 사실을 인정하지만, 덕분에 이제는 이런 걸 그만 좋아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지금의 나는 각종 무가지, 스튜디오 ‘피그말리온’이나 ‘프로파간다’의 포스터로 대변되는 인디, 예술 류의 영화에 관심을 끊은 것은 물론 ‘아기자기한 맛’이라는 익선동 같은 장소에 단 1분도 발 딛기 싫으며 ‘낭만’ 같은 단어에는 진저리를 친다. 20대 초반 좋아했던 <보통의 존재>,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처럼 자조와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찬 에세이, 비교적 최근 쏟아지기 시작한 어차피’, ‘어쩌다’, ‘아무튼’ 같은 부사가 붙은 무언가도 지긋지긋하다.


앞서 말한 것들을 좋아하는 마음을 뭉뚱그려 ‘인디 감수성’이라 명명하고 싶다. 나는 이 감수성이 사람을 나아가지 못하게 붙들어 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자기파괴, 아날로그 등 한결같은 요소가 뒤섞인 서사와 공간을 두고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서 행복하다’ 여기는 소규모 마인드가 사람으로 하여금 시대에 발맞춰 변화를 추구하게 하기 보다는 주저앉아 ‘나의 취향’, ‘나의 소확행’을 끌어안게 만든다.


나는 정말이지 이 모든 것에 흥미가 떨어졌다. 그리고 이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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