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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기억

Thoughts

by TokyoShin 2018. 2. 27.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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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보스토크 강의에서 김신식 비평가가 던진 화두가 자꾸 떠오른다. 그는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서 파생한 "서사는 물질이다"라는 주장을 중심으로 사진을 소개했다. 그걸 잠자코 감상하면서도 그가 말하는 바가 쉽게 이해되지 않아 조금 머리가 아팠다. 집으로 돌아와 <물질과 기억>과 관련한 내용을 웹에서 찾아보았지만, 여전히 어렴풋하다.


그가 소개한 사진 중 가장 관심이 갔던 것은 장 칭윤 Zhang Qingyun 사진가가 뉴욕의 홈웨어 브랜드 피욜르 Piaule와 함께한 작업이다. 단순한 물건을 둘러싼 서사를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작가는 한 소년과 피욜르의 투명한 유리잔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서사가 된 이미지는 제품 설명과 나란히 놓여, 단순명료한 서술을 확장한다. 예를 들어 "종잇장처럼 얇은 가장자리는 음료와 음용자를 거의 떼어놓지 않습니다 The Paper-thin edge barely separates drinker and drink"라는 서술 옆에 놓이는, 소년의 손가락이 우유에 살며시 닿은 사진은 유리잔과 음료가 손과 입술에 닿는 촉감을 상상하게 한다. 뒤이은 서술인 "하지만 신기하게도, 엎질러져도 문제없을 만큼 튼튼합니다 But it's mysteriously strong ― durable enough to survive a spill" 옆의 긴장감 있는 사진―얼음 조각으로 장난을 치는 소년의 모습이나 콜라가 담긴 잔과 두꺼운 책, 연필을 살포시 쥔 소년의 무서울 것 없는 표정이 한 자리에 있는―은 또 어떤가. 아슬아슬하지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진은 그 자체로 "이상하리만치 강하고 견고한"의 의미를 드러낸다. 유리잔에 대한 사실을 이미지로 증명하는 멋진 작업이다.


Zhang Qingyun: Piaule


이걸 보고 곧장 떠올린 것은 좋아해 마지않는 논픽션 홈 Non-Fiction Home의 가구 16/03―의자, 사이드 테이블, 혹은 간단한 수납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이었다. 제품에 서사를 부여해 쓰임의 확장을 도모한다는 점에서였는데, 위 내용을 쓰고 보니 피욜르와 장 칭윤의 프로젝트는 결코 확장성을 주요 포인트로 삼지 않고, 제품에 대한 서술이 논픽션 홈의 것에 비해 명확하다는 데서 사뭇 다르다.


책은 읽지 않아도, 우린 앉아 있다

 

독서가 비주류 문화가 되면서 작가는 ‘구림’의 상징이 되었다.

책은 소외받고 가난해졌지만 그렇게 경계에 도달했고, 지금 이전에 없던 문학이 시작되었다(한국).

디자인은 다르다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은 척했고 소외받은 적은 없었다.

 

경계로 나아간다.

각자의 방식으로 시도 실험 행동한다. 경계로 나아간다.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 새로움은 늘 태도에 달려있었다.

 

생활을 고려한다.

한계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생활을 벗어나지 않는다.

불편하진 않지만,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흥미롭게 하고,

낯설지만 누군가는 꼭 가지고 싶어 할 것을 만든다. 그래서 이상하더라도, 아름답게.

어떤 생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 조규엽, 디자이너, 플랏엠

 

- 1 -



나는 아직 이 의자에 앉지 않았다

 

의자에 대한 글을 부탁받았고

의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사진을 봤다.

의자는 오래된 성벽처럼 보였다.

 

이 의자는 앉기 편합니까?

내가 물었다.

 

의자가 꼭 앉기 편해야 합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의자에 앉는다는 사실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니까 실용성을 포기하고 미적으로 가겠다는 건지,

실용성과 미감을 모두 추구하겠다는 건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디자이너는 말했다.

사실 우리도 잘 모릅니다.

다만 우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가구를 만들었는데

그때마다 어떤 벽에 부딪혔고,

그 벽은 어떤 한계를 뜻했는데

어느 순간 벽 안에서 의자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벽과 벽의 경계에 놓일 가구를 만들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의자의 장점은 뭔가요?

내가 다시 물었다.

 

디자이너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나는 아직 이 의자에 앉아보지 않았지만

그 말을 듣고 앉고 싶다고 생각했다.

 

의자는 앉기 위한 게 아니다.

일어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내가 묻자

디자이너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것도 좋네요.

 

- 정지돈, 소설가, 후장사실주의

 

- 2 -

조규엽, 정지돈: Non-Fiction Home


다시 피욜르의 프로젝트를 생각해본다. 아래 내용은 웹에서 본, <물질과 기억>을 요약한 문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지각을 더 선명하게 강렬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각이 아니라 바로 기억-이미지이다. 낯설고 잘 알 수 없는 물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물체를 더 잘 지각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물체를 보고 냄새를 맡고 이리저리 굴려본다고 한들 그것을 잘 지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물체는 우리 신체 이미지에 대해 드러낼 비밀이 더는 없는 그대로의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과거 일반, 잠재적인 기억뿐이다."


어쩌면 내가 피욜르의 유리잔에 대한 서술과 장 칭윤의 사진이 내포한 의미를 위와 같이 이해한 것은, 나에게 보편적인 유리잔, 액체, 얼음을 경험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소년의 표정을 "무서울 것 없는"이라고 읽어낸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이미지 속 사물 안에는 이미 나의 지각이 스며 있기 때문에, 이를 서사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서두에 말한 김신식 비평가의 주장 "서사는 물질이다"를 이렇게 이해해도 되는 걸까. 마지막으로 위와 같은 문서에서 가져온 문장을 하나 더 덧붙인다.


"예술의 창조나 감상은 잠재적 기억들을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현재적 감각으로 어떻게 재생하고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Image & Reference

Piaule https://piaule.com/

It's Nice That https://www.itsnicethat.com/articles/zhang-qingyun-piaule-photography-310118

Non-Fiction Home https://www.nonfictionho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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