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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무해한 남성상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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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kyoShin 2018. 12. 23.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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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무해한 남성상의 계보




1. 계보의 배경: tvN과 JTBC

2010년대 한국 드라마 시장의 가장 유의미한 변화는 tvN과 JTBC가 새로운 축으로서 대중에게 지상파 3사를 훌쩍 뛰어넘는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방송사는 드라마 소재의 폭을 넓히고, 사회 흐름을 빠르게 캐치해 서사에 반영하면서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휴머니즘의 tvN

2012년 tvN 드라마국은 유례없는 대중적 성공을 거뒀다. 그해 여름 <로맨스가 필요해 2012>는 트렌디 로맨틱 코메디 장르에 한 획을 그었으며, <응답하라 1997>은 ‘현대 시대물’이라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장르를 구축했다.


이후 tvN은 수년간 괄목할 만한 작품을 줄줄이 내놓으며 지상파 3사가 힘 겨루던 드라마 시장의 단단한 축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응답하라> 시리즈로 2013년과 2015년을 잇따라 풍미하며 2010년대를 수놓은 레트로 열풍의 구심점 중 하나가 되었다. <식샤를 합시다>, <오 나의 귀신님>, <또 오해영> 등 검증된 로멘틱 코메디 공식에 소재의 신선함을 더한 작품으로 ‘로코 명가’의 입지를 굳혔으며, <시그널>, <굿와이프>, <비밀의 숲> 등 주류가 되기 힘든 장르물의 태생적 한계를 한국적 휴머니즘으로 뛰어넘었다.


현실 반영의 JTBC

JTBC 드라마국의 저력이 돋보이기 시작한 것은 2014년 부터다. 2011년 말, 종편을 비판하는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개국한 JTBC는 호불호 적은 배우 한지민과 정우성, 소외된 인물을 인류애로 끌어안는 노희경 작가 조합의 드라마 <빠담빠담>으로 드라마 시장에  안착했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시청 타깃을 확장한 tvN과 달리, JTBC는 TV 이용률이 높은 중년 여성을 우선적으로 공략했다. 이같은 전략에 힘을 실은 것은 정성주, 안판석 콤비였다. 사회 계층을 향한 정성주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담긴 극본과 안판석 PD의 밀도 있는 연출은 <아내의 자격>의 성공에 이어 2014년 <밀회>로 큰 화제를 끄는 데 성공한다. <밀회> 이후 JTBC는 <청춘시대>, <힘쎈여자 도봉순>, <품위있는 그녀>, <미스티>,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등의 작품을 통해 타깃 연령대의 균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사회 구조와 갈등을 현실감 있게 그리는 드라마’라는 나름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각각 휴머니즘과 현실 반영을 발판 삼는 두 방송사의 서사 위에서, 무해한 남성상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진솔하고 바른 남성상, 2010년대 페미니즘이라는 커다란 사회적 물결을 반영해 여성의 고충을 이해하고 무례하지 않으려 애쓰는 남성상이 줄줄이 등장하고 각광받았다.




2. 계보의 얼굴: 임시완, 박보검, 정해인, 차은우




백조의 시완 (2014 - 2015)
<미생>은 2014년 말 유일무이한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원작자 윤태호에게 “전형적인 러브라인은 넣지 않겠다”는 약속을 걸고 드라마 판권을 따낸 tvN은 건조한 청색 화면에 직장인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담았고, <미생>은 뭇 직장인의 공감을 자아내며 그해 최고의 콘텐츠가 되었다.

‘러브라인 프리’가 약속된 드라마에서 임시완이 분한 장그래는 2010년대 무해한 남성상의 시초다. 수면 위로는 평온해보이지만 그 아래에서 쉼없이 물갈퀴질 하는 백조처럼, 그는 2014년 누구보다 하얗고 반듯한 얼굴로 ‘우리 모두의 미생’을 연기했다. 시청자들은 자연히 그를 ‘어느 누구의 남자’가 아닌 ‘우리 모두의 장그래’로 소비했다. 숱한 인기 드라마가 대대손손 최상의 가치라 전하는 헤테로 연애감정의 대리물로 소비할 구석도 없으니,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며 귀여워했다.

<미생> 이후 임시완은 <오빠생각>으로 무해한 남성상으로서의 존재감을 공고히 하는가 싶더니 2017년 <불한당>으로 “암청색 영화”의 세계에 입성했다. 무수한 ‘불한당원’을 양성하며 컬트적 인기를 얻은 이 영화를 통해, 임시완은 자신의 무해한 이미지를 가차없이 버렸다. 그는 곧이어 <원라인>에서 ‘사기계의 샛별’이 되면서 적극적으로 계보를 뛰쳐 나간다. 

한 인터뷰에서 “대중이 느끼는 임시완과, 스스로가 느끼는 임시완 사이에 괴리감이 있다”고 밝힌 그는 자신이 특정 이미지에 갇히는 것을 견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군복무 중인 그가 다시 컴백할 날은 머지 않았지만 한번 계보를 떠나버린 그의 무해함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텐아시아, 임시완 "저에게 속고 계시는 거라니까요"(인터뷰), 2016.01.18.




보검의 검술 (2015 - )
2015년은 <해를 품은 달>, <별에서 온 그대>를 거치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김수현이 <프로듀사>에서 어리숙한 신입PD를 연기하며 이미지 전환을 시도한 해다. 바로 그해 박보검은 <응답하라 1988>의 어리숙한 바둑기사 최택 역으로 무해한 남성상의 해와 별이 되었다.

박보검은 “열 번 잘 하다가 한 번 잘못하면 다 물거품이 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 배우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을 둘러싼 무해한 남성상의 울타리를 함부로 뛰쳐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캐릭터 밖 실제에 가까운 박보검을 노출하며 무해함의 근거를 양산하기에 이른다. 그는 <응답하라 1988> 이후 tvN <꽃보다 청춘 아프리카>에서 연신 “감사하다”를 외치며, JTBC <효리네 민박>에서 햇살 아래 책을 읽다 낮잠을 청하며 자신의 무해함에 신뢰를 차곡차곡 적립해 나간다.

이렇듯 박보검의 능력은 실제 인물과 캐릭터라는 양면으로 살 수 밖에 없는 배우라는 직업적 한계 혹은 특성임시완이 느꼈던 바로 그 괴리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있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계승한 누구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결연한 의지, 감사와 진실을 추구하는 신앙이 만드는 영리한 기술이다. 그는 여느 남배우처럼 암청색 영화에 편입되는 대신, “소년소년, 청년청년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때 많이 보여드리려고요”하고 말한다.** 기꺼이 ‘청포도’로서 제 갈 길을 걷고, 만인의 호응을 얻는다. 그렇게 홀로 2010년대 무해한 남성상의 계보를 지킨다. 

*MK, 박보검이라는 '선한 영향력'은 계속된다, 2016.04.11.
**오마이스타, 박보검 "내가 끝까지 믿을 사람은..." 말하며 울컥, 2016.10.31.




해인의 애인 (2018)

정해인은 2018년 상반기 무해한 남성상의 계보에 길이 남을 이름이다. 그는 tvN의 흥행작 <응답하라 1988>과 <도깨비>에서 주인공의 첫사랑을, <슬기로운 감빵생활>에서 억울한 누명을 쓴 유 대위를 연기했다. 애틋한 추억과 애처로움이 깃든 그의 얼굴은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만나 빛을 발했다.

사랑에 빠진 두 주인공을 화보처럼 담아내는 연출 뒤로 카를라 브루니의 노래가 흐르는 세피아 톤 화면 안에서, 정해인은 진아 누나만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연하남이자 애처로운 가정사를 품은 서준희로 활약했다. 낯익은 듯 새로운 백자 같은 얼굴은 그대로 캐릭터의 설득력이 되어 뭇 여성들의 마음에 둥그렇게 자리했다.
 
그의 인기가 나날이 상승하면서 그가 몇 년 전 한 인터뷰 내용이 덩달아 화제가 되었다. ‘함께 연기하고 싶은 여배우’를 묻는 질문에 “좋아하는 남자 배우들은 많은데 여자 배우들은…”이라며 대답을 망설이다 “저 동성애자는 아니다. 여자 좋아한다”고 해명을 했다는 것이다.* 반면 남배우의 이름을 나열하는 데에는 거침이 없었다. 배우로서의 롤모델은 박해일과 신하균, 좋아하는 배우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데인 드한, 신하균.** 서준희가 아무리 진아 누나만을 바라보든 정해인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 속에 여성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음에 담았던 그의 무해한 이미지는 가차없이 깨졌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이후의 정해인은 정관장과 삼성화재, 현대백화점이 선택한 신뢰의 이름이지만, 세 브랜드의 낮은 접근성이 대변하듯 그가 대중의 마음에 폭넓게 자리하기는 영 쉽지 않아 보인다.

*스페셜경제, 정해인, 인터뷰 중 동성애자 해명? "여자 좋아해" 다급했던 이유, 2017.11.15.
**한겨레, '준희앓이' 낳은 듬직한 상남자 동생, 2018.05.11.




은색의 은우 (2018 - )
얼굴천재. 드라마 안팎을 넘나드는 차은우의 수식어다. 그는 루키즘으로 범벅된 사회가 그야말로 찬양을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이 계보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차은우는 천재적이라는 얼굴에 모범적인 성격을 보태, 무해한 남성상의 새로운 얼굴이 되고 있는 중이다.

차은우는 올여름 JTBC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에서 도경석을 연기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도경석은 세상 혼자 살듯 잘났지만 가정사의 아픔을 지닌 부잣집 아들의 전형인 한편, 차가운 얼굴로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캐릭터였다. 이후 차은우는 유튜브 드라마 <탑매니지먼트>에서 차가움을 완전히 벗어던진다. 그속에서 차은우는 연기는 어설프지만 잘난 얼굴과 선한 성격으로 만인의 사랑을 받는 차은우 그 자체다. 그는 그렇게 화이투벤, 크린토피아, 11번가 등 생활밀착형 브랜드의 얼굴로 소비자의 안녕을 바라는 환한 눈웃음을 선보이게 되었다.

2010년대 무해한 남성상의 계보를 잇는 가장 어리고 트렌디한 차은우. 그래서 좀 더 가볍게 소비되고 있는 그가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와 "너 자신을 알라”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이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적어도 당분간 이미지를 제손으로 깨뜨릴 일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박보검의 노선을 따를까? 2010년의 마지막 해, 그가 차지할 자리가 궁금해진다.


*GQ코리아, MEN OF THE YEAR 2018 - 차은우, 201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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