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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201

by TokyoShin 2018. 10. 13.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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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에 먹고 산 것



김치찌개


공덕동에서 볼 일을 마치고 메뉴가 즐비한 김가네에 들러 김치찌개를 먹었다.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지다니. 그런데 그걸 먹은 곳이 김가네라니. 김치찌개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K-음식을 먹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결국 이 땅에 속박된 사람이라는 생각에 허탈하다. 음식을 시키기 전에 기본찬으로 단무지와 김치가 나왔다. 단무지와 김치와 김치찌개. 한 톨의 자비없는 강강강의 폭격. 뚝배기에서 찌개가 팔팔 끓었다. 옆에는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쌀밥이 나란히 놓였다. 수저통에서 숟가락을 꺼내 찌개를 휘저었. 충분히 식히지 않으면 혀를 델 게 뻔했다. 천천히 한 술을 떴다. 찌개도 국도 아닌 맛. 그러나 나는 입 안에 들이닥친 시고 짠 김치맛의 향연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우러난 국물이 애매할지언정 김치는 언제나 김치일지니. K국에 진하게 소속된 대가로 육천 원의 값을 치르고 매몰차게 돌아섰다. 너무 서글펐다.


 

고무장갑


김치찌개를 먹고 롯데 프리미엄 푸드마켓에 갔다. 뒤로 일정이 있어 무얼 살 생각은 없었지만 먼 곳에서 온 다채로운 채소와 과일, 식료품을 구경하는 일은 속박된 설움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것이었다. 먹기 좋은 소포장 과일, 맥을 못 추는 것처럼 보이는 허브, 이거나 사 먹을 걸 그랬나 싶은 회초밥을 지나 각종 소스, 오일, 와인을 거쳐 주방용품 코너에 도착했다. 나는 거기서 터키석 색상의 미끈한 고무장갑에 매료되었다. 사용하던 고무장갑 한 짝에 뜨거운 냄비를 올려 겉면을 검게 그을린 바람에 새로 사야하던 참이었다. 아름다운 고무장갑은 반으로 접힌 채 투명한 비닐에 들어있었는데, 그 모습이 요란한 비닐에 기다랗게 들어있거나 투박하고 네모진 상자에 든 것 보다 훨씬 고결해보였다. 설거지나 청소 따위의 하잘 것 없는 루틴이 아닌, 수술용 정도의 원대함까지 갖춘 것 같았다. 포장 비닐의 정중앙에 붙은 하얀 딱지가 품위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딱지에는 "항균처리" 같은 나대는 말 대신 꼭 필요한 네 마디와 바코드만 찍혀 있었다. CleanCare / GREEN GLOVE / MADE IN MALAYSIA / SIZE M. 이 모든 품격을 조금도 깎아내리지 않는 값은 7천 원. 여느 고무장갑의 네 배 쯤은 되는 가격이었다. 아주 잠깐의 고민 끝에 그것을 가방에 모셨다. 다음날 아침 포장을 뜯어 손을 넣은 순간, 나는 돈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야말로 '체감'했다. 미끈하고 착잡한 고무 나부랭이가 아닌 천연 라텍스가 부드럽고 산뜻하게 손을 감쌌다. 보드라운 안감이 덧대어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 탄탄한 천연 라텍스는 쓸데없이 몸을 부풀리는 법 없이 시종일관 납작한 형체를 유지해, 싱크대 수전에 대충 걸쳐 놓아도 보기 좋았다. 아. 이제 격 없는 고무장갑에 손을 넣는 일이 불경스러워지겠구나. 나는 또 한 번 서글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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