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일이다.
영화제 현장판매 티켓을 사겠다고 아침에 나왔다.
남아있을 줄 몰랐던 '보이후드' 표를 샀다.
기분이 막 좋아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뭘 좀 먹어야지, 백화점에 들어가서 스무디랑 베이크를 먹었다.
영화 시작까지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문득 어젯밤 바닷가에서 만난 사람이 생각났다.
바다를 마주하고 앉아 있다 그 사람을 보았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백팩을 메고 바닷가의 순간 순간을 찍고 있었다.
그 장면에 이상하게 이끌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맴돌다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수염 멋지네요."
상대방은 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어디에서 왔어요?"
"스페인이요."
"와, 영화 보러 왔나요?"
"네"
"어떤 거요?"
"고도의 압력이요."
"아하하, 잘 모르겠네요. 전 토요일에 미셸 공드리 영화 볼 거예요"
"미셸 공드리?"
"네, 프랑스 감독이에요."
"아, 미셸 공드리!"
"네, 진짜 좋아해요."
몇 마디를 더 하고는 헤어졌는데, 그 사람도 내가 가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가세요?"
"네, 이제 호텔에 가야 해요."
"음. 저, 혹시 우리 내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하하, 어떻게요?"
"음. 페이스북 있어요?"
"네, 그렇긴한데 지금 핸드폰이 안 돼요."
"아, 그래요. 슬프네요."
"네, 뭐. 하하."
"아하하 그럼 잘 가요."
카달로그를 훑어보니 오늘 저녁 7시 30분에 '고도의 압력'이 있었다.
페이지를 넘겨 영화소개를 봤다.
스페인 영화였다.
순간 그 사람이 했던 말들이 한꺼번에 머리를 스쳤다.
허겁지겁 감독 이름을 검색했다.
얼굴이 조그맣게 나온 사진이 하나 떴는데, 분명 그 사람이었다.
당장 영화의 전당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기다리는 사람도 몇 없었고, '고도의 압력'은 매진이 아니었다.
아까 '보이후드' 표를 샀을 때보다 더 기뻤다.
12시에 보이후드를 보고 이런저런 걸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대개는 그저 앉아있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렀다.
7시 30분에 고도의 압력을 보러갔다.
영화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좀 우울했다.
처음 그 사람을 봤을 때 풍기던 분위기랑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어떡할거냐는 여자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답하는 남자의 말을 끝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영화가 끝나고, 그 사람과 남자 주인공 미겔 역을 맡은 배우가 왔다.
질문을 받기 전에 그는 이 영화를 찍기 전에 참고한 영화가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이라고 했다.
홍상수 감독의 나라인 한국, 부산에서 영화를 상영하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세상에.
굉장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GV가 끝나고 그 사람과 배우는 관객들에게 둘러싸였다.
그 주변이 좀 한산해지길 기다렸다.
마침내 감독이 날 봤을 땐 반갑게 인사해주었다.
안부를 묻고, 와 줘서 고맙다고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감독인 걸, 내가 알고 있었노라 생각한 것 같았다.
그와 배우에게 내 가방에 있던 '부산' 스티커를 건넸다.
영국 가면 쓰려고 얼마 전에 발란사에서 산 거였는데 여기서 쓰기로 했다.
'미겔'은 내게 굿바이 키스라며 비쥬 인사를 해 주었다.
그렇게 극장을 빠져나왔다.